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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과 인간의 미래

생명공학, 철학, 논술 등 방통대 생명공학과 인간의 미래 요점 정리 15. 생명과학, 생명정치, 생물학적 시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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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강 생명과학, 생명정치, 생물학적 시민권

15.1 생명과학/생명공학 기술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

 

생명과학/생명공학기술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들은 생명윤리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경향이 있다. 왜 이러한 문제들이 생명윤리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 그 과정 자체에 대해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생명윤리의 문제 자체도 정보에 입각한 동의나 기관윤리위원회 심사, 개인의 자율성과 사생활 보호 등 특정한 제도적, 이념적 틀 외의 방식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명윤리의 문제들이 전문가들만이 논의하는 문제가 아니며 생명공학 기술이 발전하고 생명이 기술적으로 정의되는 사회에서 생로병사의 매 순간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상적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종종 일반사람들은 스스로 전문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생명공학기술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려운 결정에 맞닥뜨려서 당황하곤한다. 사실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에서 이를 규제하기 위한 윤리적 논의는 현실적으로 그 뒤만 따라가기도 벅차 보인다. 게다가 개개인이 처한 구체적 조건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막상 어떤 상황에 처해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하고자 할 때 그들이 당위론 이상의 속 시원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경우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는 전문가들의 논의가 애초부터 개개인의 상황 보다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윤리를 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던 대중들이 일상적 삶속에서 경험하는 생명공학기술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들을 제도 중심의 생명윤리 전문가들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에서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지만, 그 이전에도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이후 일련의 철학, 윤리학, 법학 및 의학 전공자들은 의료윤리의 연장선 에서 장기이식, 인공수정, 낙태, 뇌사, 안락사 등의 이슈를 논하는 가운데 서구의 생명윤리 연구 동향을 꾸준히 소개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생의학 연구가 급증하고 체외수정기술 등 의료 시술의 개발이 확산됨에 따라 의료계 내에서도 생명윤리 논의의 중요성이 부각되기에 이른다. 1993년 경희의료원의 인공수정 파행시술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경향신문, 1993.1.21), 이에

대한 의사협회는 <인공수태윤리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고 인공수정, 체외수정과 배아이식 지침을 마련하였다. 또한 협회는 2년여 준비하여 19974월 제정한 의사윤리강령에도 시술과 의학

연구조항을 비중 있게 포함시킨다. 같은 해 11월에는 의대 교수진을 주축으로 한국의료윤리교육 학회가 설립되는데, 적지 않은 수의 구성원들이 의료윤리의 틀 내에서 생명윤리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밖에 천주교와 기독교계에서도 주로 낙태 이슈를 중심으로 기독교적 생명윤리 담론을 펼쳐나갔다 (박상은). 이러한 배경 하에 19982월 한국생명윤리학회(이하 생명윤리학회)가 창립된다. 그런데 생명윤리학회가 이 시기에 설립된 것은 기존에 이루어진 논의의 축적만큼이나 새로운 사회적 상황 에 의해 추동된 것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미 국내에서도 유전공학과 생명복제기술에 대한 대중적 논란이 격화되고 있었다. 복제양 돌리의 탄생소식이 전해지자 19973월 천주교 주교회의는 정부 와 국회에 인간복제 관련 실험 금지법 제정을 청원하였고, 7월에는 장영달 의원 등이 인간복제 금지 조항을 포함시킨 생명공학육성법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하였다. 장영달의원의 법안은 계류되었으나

이듬해 이상희 의원 등은 법 개정을 다시 추진한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생명과학기술 육성이 저해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안전·윤리 기준을 도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일부 사회운동 진영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적·윤리적·환경적 파급효과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되는 생명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비판적이었던 활동가들은 규제육성을 위한 법에 의거한다는 발상 자체를 받아들일수 없었다. 199899개 사회운동 단체들은 생명안전·윤리 연대모임(이하 연대모임)’을 결성하고 별도의 생명안전·윤리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선다.

생명윤리학회가 학회 회칙의 목적에서 의제의 범위를 생명과학기술을 인간사회 및 생물권에 응용 할 때 일어나는 철학적·윤리적·법적·사회적·경제적·의학적·환경적·종교적·인류학적 문제들로 폭넓게 규정하고, 연구만이 아니라 그 성과를 실천할 것을 명시한 것은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한국생명윤리학회,1998). 실제 생명윤리학회는 학술회의를 조직하는 것 외에도 199811월과 19999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하는 유전자조작 식품과 생명복제기술 합의회의를 후원하는 등 생명윤리 논의의 중요성을 공론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유네스코한국

위원회, 1998, 1999). 그러나 공공 생명윤리기구가 부재한 상황에서 생명윤리학회와 그 구성원들이 생명윤리 전문가로서 생명과학기술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는 제약되어 있었다. 19993월 생명윤리학회가 개최한 생명복제 워크숍에서는 참석자 연명으로 생명복제에 관한 1999년 생명윤리선언이 채택되는데, 학회 주요임원들이 참여한 이 선언은 인간 개체 복제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는 동시에 대통령 직속 심의·감독기구로 생명윤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생명공학의 윤리적·법적·사회적 문제들을 연구하기 위한 전문연구기관을 설립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한국생명윤리학회, 1999). 사실 공공 생명윤리기구의 설치 문제는 생명윤리학회의 선언 이전 생명공학육 성법개정 논쟁이 시작될 때부터 핵심 사안의 하나로 제기되어왔다. 논쟁의 한 축이었

던 이상희 의원의 개정안이나 이에 반대했던 사회운동 단체들 모두 그러한 기구의 필요성을 전제 했지만, 서로 매우 다르게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다. 전자는 안전·윤리위원회를 생명과학기술 진흥 정책의 일부로서 접근했고, “생명공학육성법을 개정하여 과학기술부 산하에 설치하고 해당 분야 학계·연구기관·산업계 인사, 관계부처 공무원 및 종교계 대표로 구성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반면, 연대모임은 이를 생명과학기술의 발전이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아래공익을 침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사회적 통제의 장치로 이해했다. 그 이면에는 과학기술 정책결정이 과학기술 전문가, 산업계, 그리고 정부 관료에 의해 독점되어서는 안 되며 시민대중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생명안전·윤리 문제를 심의하는 기구는 별도의 생명안전·윤리법을 통해 개발 부처가 아닌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되어야하며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 혹은 시민사회단체도 참여할 수 있도록 법제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차이는 199912월 국회가 그 때까지 제안된 개정안들에 대해 의견을 수렴하고자 개최한 공청회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은 채 20005월 국회 회기가 만료됨에 따라 법안들은 폐기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공학육성법개정을 둘러싼 논쟁은 생명안전과 윤리 이슈를 다루기 위한 독자적 법안과 공공 생명윤리기구 의 필요성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달 보건복지부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가칭)‘생명과학보건안전윤리법안을 마련할 것을 요청하였고, 과학기술부 역시 생명공학육성법과 별도의 법안을 준비하기 시작하였

. 결국 20009월 국무조정실의 조정을 거쳐 과학기술부가 새로운 법 제정을 주관하게 되는데, 장관 소속의 생명윤리자문위원회을 구성하여 이를 통해 진행하도록 하였다(과학기술부, 2000). 이 위원회는 법을 만들기 위한 한시적인 기구였지만, 인간배아연구의 허용 여부 및 범위 등을 비롯한 주요 사안들에 대해 심의·결정한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공공 생명윤리의 실험 이었다.

 

15.2. 일상과 윤리

 

의료인류학자인 아서 클라인만 (Arthur Kleinman)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모델에 흔히 의지해 온 생명윤리의 개념이 서구 중심적이고 의학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문제의 설명을 개인의 심리로 한정 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특정 지역의 사회현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도덕(moral)적 과정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도덕이란 옳고 그름이나 바람직함과 같이 가치판단에 관한 것이라고 정의한 후, 도덕은 그와 마찬가지로 가치판단에서 출발 하지만 보편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윤리(ethics)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라 본다. 또한 그는 도덕적 가치는 특정한 지역적 맥락에서만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되며, 바람직한 도덕을 구현하는 과정이란 개인에게도 집단에게도 투쟁과 타협의 연속이지, 결코 현재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바는, 각 지역에서 도덕적 가치가 작동하는 방식 을 도외시한 채 좁은 의미의 개인주의적 윤리에 기반을 둔 생명윤리가 아닌, 새로운 생명윤리 논의 의 가능성을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껏 보면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기존에 존재했던 인간과 자연의 경계, 가족의 개념 등이 붕괴 되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위기에 처했다는 위기 담론이 생명윤리 논의의 가장 흔한 방식 중의 하나 인 듯하다. 물론 생명공학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양상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 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새로운 현상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더 깊은 성찰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는 억압이고 부당할 수밖에 없는 낡은 관념들로 종종 회귀하곤 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줄기세포 치료나 대리모 시술, 장기 매매를 비판하는 과정 에서 이 시술들이 자연적인 질서에 위배된다는 상식에 기초하여 비판을 하는 경향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내 핏줄을 가지기 위해서 혹은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냐는 식의 호소 역시 상식에 기대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낯익은 관념으로의 회귀를 통해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이란 현재 우리가 하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운 불안한 공간이며, 따라서 생명공학기술이 환기시켜주는 문제들은 반드시 새로운 것 이라기 보다는 이렇듯 애초에 일상에 내재되어온 불확실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결국 어떤 식의 생명윤리 논의든 이러한 구체적 일상의 장을 떠나서 다뤄질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이 책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바이다. 또한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무엇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지, 무엇을 욕망하는지, 미래에 대해 어떤 기대와 상상을 품고 있는지, 지식을 둘러싼 권력관계는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 재화 는 어떻게 생산되고 분배되는지, 이런 모든 일상적문제들을 배제한 채 정보공개나 동의의 문제 등 절차에 치중하여 이루어지는 생명윤리 논의라면, 이는 결국 생명과학 연구나 의료를 무리 없이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보조자 역할 이상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구글베이비를 본 사람들은 어쩌다가 세상이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세상에 정말 이런 일도 있는지,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 마땅한지 등을 생명윤리나 생명공학기술 전문가 를 불러서 묻곤 한다. 그런데 영화구글베이비를 보면서 지구화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글로벌 재생산 산업의 등장과 그 분업 구조는 물론 새로움과 놀라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 으로는 매우 진부한 이야기의 연속이기도 하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가족을 떠나서 희생하는 어머니, 그것을 알면서도 눈감고 모르는 척 협조하는 남편, 아이 없는 부부의 간절한 소망등, 영화를 본 사람들이 끔찍하고 놀랍다고 하는 현실은 단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매우 낯익은 논리들을 통해 정당화되어 우리의 일상 속에 파고드는 현실이다.

결국 일상을 위협하는, 일상과 독립된 외부적 존재로서의 과학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일상 속에서 정당화되고 자리 잡게되는 기술들, 그리고 일상화되어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실제로는 따져봐야 할 지점이 많다고 생각되는 기술 영역에 대해서라고 할 수 있다.

 

15.3. 생명정치

 

그렇다면 어떻게 전문가 중심의 기존 생명 윤리의 낡은 잣대가 아닌 일상 속의 생명과학기술을 따져볼 수 있을까? 최근 생명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과 이로 인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우리의 일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론화한 연구들이 사회과학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가 처음 제시한 생명정치(Biopolitics)”를 이론적 기반으로 하여 국가적, 사회적, 일상적 맥락에서 생명과학기술과 이를 둘러싼 권력 관계들을 드러내려 하였다. 생명정치 개념은 우리의 일상에 깊게 연루된 생명과학기술을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푸코는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형태의 정치 양상이 나타난다고 보았으며, 생명정치라는 이름으로 17세기 이후 나타난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새로운 정치형태를 지칭하려했다. 16세기가 마키아 밸리의 군주론으로 대표되는 국민의 목숨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이 왕에게 부여된 군주권 을 중심으로 한 정치의 시기였다면, 17세기부터는 정부가 국민 개개인들의 생명을 국가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규율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생명정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 생명은 정부의 개입을 통해 향상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관리과 규율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으로 생명의 관리가 국가 통치의 중심에 등장한 것이다. 푸코는 특히 18세기에 이르러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구라는 개념을 통해 국민의 생명들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려는 시도가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이때부터 출산율이라든지, 사망률, 각종 건강 통계 등과 같은 인구를 기반으로 한 통계들이 생명을 더 잘살게 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을 가능하게 했다. 푸코는 이렇게 국가가 인구를 계산하고 관리하고 향상 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들을 생명정치 시대의 권력, 생명권력(biopower)이라고 불렀다.

생명정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권력관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이는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군가의 목숨을 좌지우지 하는 형태의 가시적인 권력 관계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궤적에 관여하는 잘 보이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관계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이후 푸코의 생명정치 개념을 기반으로 여러 연구자들은 생명을 더 잘 관리하고 향상시키기 위한 국가의 시도들이 서로 다른 국가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생명정치가 정부 뿐 아니라 NGO와 같은 다른 종류의 주체들을 통해서도 나타 날 수 있음을 보이기도 했다. 이때 생명과학기술이 생산하는 지식은 국가가 생명을 어떻게 이해 하고, 관리하며, 향상시키려 하는 지와 따로 떼어 논의할 수 없는 생명정치 시대의 권력으로 작동 한다.

 

15.4. 생물학적 시민권

 

생물학적 시민권 개념은 현 시대 생명정치의 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생물학적인 나와 정치적인 내가 분리된 것이라 생각한다. 가령 당뇨병과 같은 질병을 가진 나와 대통령 선거권을 가진 국민으로서의 내가 다른 문제에 속한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정치적인 나는 여러 권리를 지닌 시민으로서, 이 권리에는 나의 생명, 건강과 관련된 부분도 포함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시민권 개념은 생명정치의 시대에 생물학적인 나와 정치적 나를 따로 떨어뜨려놓고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의료인류학자인 아드리나 페트리나(Adriana Petryna)는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이후, 우크라이나라는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시민권을 생물학적 시민권 이라고 지칭했다. 당시 우크라이나가 국가로서 건설되던 시기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로,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그 자리에 살고 있던 많은 이들이 방사능으로 인한 생물학적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방사능 노출 기준을 정하고, 적정선을 넘는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우크라이나 시민으로서 건강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페트리나는 생물학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방사능에 노출된 몸이라는 생물학적인 정체성을

기반으로 복지 서비스 등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시민적 권리가 획득되는 상황을 보

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생물학적 시민권 논의는 개개인의 혹은 집단의 생물학적인 특성을 기반으로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관계를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는 같은 질병을 가진 환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환자 운동과 같은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희귀한 어떤 병을 공통을 지닌 사람들이 이 병의 치료와 관리를 위한 국가적 투자를 증가 시킬 것을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을 위해 뭉친다거나, 의사와 같은 전문가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의학 지식에 대한 접근을 요구하는 여러 환자 운동들에서 우리는 생물

학적 시민권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생물학적 시민권 논의는 생명이 중요한 국가 관리의 대상이자 권력의 목적이 되는 생명정치의 한 국면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 태어나서부터 죽기까지 살아가는 모든 일상의 과정에서 생명과학 기술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생명의 지닌 우리에게 성찰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생명과학기술을 둘러싼 여러 윤리적 문제들은 단지 전문가들이나 생명윤리학자들의 손에만 맡길 수 없는 것이며,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생명과학기술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정치나 생물학적 시민권의 논의는 바로 그 생명과학기술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 우리에게 어떠한 가능성 허락하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는 힘을 지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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