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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학개론

신문방송과, 신방과, 언론학 등 방송학개론 핵심 요점 정리 4. 한국방송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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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방송의 역사

* 라디오방송사

1927216일 경성방송국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이 시작.

19323월 경성방송국은 조선방송협회로 개명. (일본어 이중방송)

진정한 의미의 우리방송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시작된 서울중앙방송, 즉 지금의 kbs.

194793일 우리는 처음으로 독립된 호출부호(HL)를 배정.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우리는 독립된 방송을 시작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대구방송과 부산방송국을 제외한 모든 방송국과 송신시설이 파괴

19536월 서울로 돌아가기 전까지 부산에서 전시방송체제를 이어가야 했다.

 

최초의 방송 시작이 일제 강점기 호출부호 JODK. 여기서 JO가 일본에 부여된 호출부호.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HL은 정부수립 1년전 1947.9.3에 받은 것. 독자적인 호출부호 배정받고 남한 10개 방송국 호출부호를 바꿨다. 93일을 방송의 날로 기림.

 

* TV시대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은 1956년에 시작되었다. 미국 전자제품 회사인 RCA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후 화재로 방송을 중단되었고 박정희 군사정부는 국민에게 주는 선물로 텔레비전 방송 개시를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19611231KBS TV가 개국했다. 졸속준비로 장비와 시설은 매우 열악했고 상당한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다. 유료광고와 TV시청료가 도입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196412월에는 동양TV TBC가 문을 열었고 69년에는 문화방송이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TV 3사는 시청자 확보를 위해 흥미위주의 프로그램 중심으로 편성했다. 문화공보부의 시간대별 편성지침에 따라 오래 가지 못함. (정부의 언론정책은 유신체제를 지키기 위한 수단)

 

* 유신체제하의 방송규제?

문화공보부에 방송정책을 강화한다든지 또 교양방송을 집중적으로 강화한다든지 그래서 윤리규정을 강화한다든지 이렇게 해서 방송이 권력연장을 도구로 정권유지의 도구로 그렇게 쓰여지는 불행한 사태가 나타남.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민주화에 대한 희망이 싹트는 듯 했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전권을 장악하며 이런 희망은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불안정한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여론조작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언론을 장악하고자 했다.

 

* 신군부가 언론탄압을 단행한 이유는?

방송을 권력장악도구로 삼음. 국론을 통합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획일화시켜서 자기들의 정권장악을 위한 수단으로 삼음. 신군부의 언론탄압으로불과 보름만에 전국에서 7백명이 넘는 언론인이 해직되고 언론통폐합이 이루어졌다. 19801112일 오후 각 언론사 대표들은 정부기관에 소환되어 언론 통폐합 조치를 통고받고 이를 수락하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했다. 민영방송은 폐지조치로 동양방송과 동아방송은 KBS에 통합되고 KBSMBC 두 채널만 남게 되었다.

이런 조치는 KBSMBC 두 방송사의 성장을 돕는 계기가 되었다.

 

* 컬러방송의 도입이 우리나라 방송발전에 가져온 영향은?

이것은 다만 흑백영상이 컬러로 바뀌었다 그런 측면보다는 프로그램의 영역이 아주 확대되고 다양해짐. 방송의 편성과 제작의 큰 변화를 가져옴.

 

50년대말 민영상업방송시작, 부산문화방송이 탄생하여 상업방송시대가 열린다. 63년 동아방송DBS, 64년에는 동양방송TBC, 64년 동양TBC-TV, 61년 국영KBS-TV시작 이렇게 60년대는 국민영 이원체제였다.

73KBS가 공사화하면서 공민영방송의 시대로 넘어감 KBS는 정부감독하의 국영방송이 아닌 것. 정부와 거리를 둔 독립적 기구가 됨을 의미. 실제는 물론 달랐다. 70년대 80년대는 고난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않은 독재정권은 어느 나라건 방송을 장악하여 국민의 눈속임과 우민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다. 우리 군사정권 시절도 마찬가지. 공사로 독립시켜 공영방송시대가 되었지만 빚좋은 개살구였다.

우리방송사에서 가장 큰 기록으로 남은 사건은 역시 신군부와 함께 온 언론통폐합이다. 한국언론의 대대적인 구조개편이 단행됨. 전국의 신문사, 방송사, 통신사를 인위적으로 통폐합. 예컨대 신문은 1개도에 1개지 원칙, 통신사는 연합통신으로 통페합. 방송은 KBS, MBC로 통페합, KBSMBC본사주식 70% 인수하여 외형상 MBC도 공사. 신문사 방송사할 것 없이 상당수 기자를 해임하여 해직기자라는 고유명사를 남긴 사건.

80년대는 컬러방송이 시작되어 국민의 감각을 확대시킨 역할. 8012KBS 1TV 시작으로 확대.

 

* 북한방송사 - 북한방송의 시작, 방송 첫날부터 김일성주석의 항일투쟁기를 강조하면서 선전, 선동형 방송의 모습으로 출발. 혁명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을 선동하고 조직동원하는 것. 한마디로 북한방송은 정권이 완전히 장악하여 북한인민을 상대로 선전 선동하는 수단으로 설정됨.

북한방송이념은 노동계급의 이익대변, 당에 대한 충실, 조선로동당, 막스레닌주의 정치철학, 부르주아계급과 제국주의 세력과의 비타협 투쟁 등을 구현하는 것. 현재 북한은 각각 4개의 TVRADIO 방송을 운영하고 있다. 라디오 방송의 경우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라디오, 평양인민FM, 구국의 소리방송 등이 있고 TV방송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조선중앙TV. 이 외에도 개성텔레비전방송1997년 김정일의 생일에 맞춰 신설된 교육문화TV, 평양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수대TV가 있다.

 

* 남북방송교류 - 북한에서 중국드라마는 볼 수 있지만 동남아에 한류열풍을 불러일으킨 남한의 드라마는 볼 수가 없다. 남과 북의 방송교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탈북자의 경우 절반 이상이 북한에 있을 때 남한방송을 들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현재 북한주민들 내부에서도 남한의 사회교육방송을 듣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은 바깥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는 알권리가 있다. 그 부분에서 남한방송의 역할은 무척 크다.

 

* 남북방송교류의 필요성

지금 사회교육방송에 대해서 일정한 즉 대북방송에 대해서 일정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그 부분에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함.

그런 부분에 대한 평가나 주장은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이 외부의 정보를 알아야하는 것이 외부정보를 아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권리를 본다면 남한방송은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음. 남북방송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부터다.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방송프로그램에는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다.

남한에 대한 보도에 긍정적인 내용이 증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과 북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고 좋은 이미지를 갖게 하는데 있다. 여기에 방송을 통한 문화교류는 큰 몫을 담당한다.

KBS에서 주관한 남북교향악단 합동공연은 남북 동시 생방송으로 진행된 평양노래자랑과 함께 남북방송교류의 가장 큰 발전 중 하나로 꼽힌다.

 

물꼬를 텄지만 국제무대에서 북한정권의 입지가 악화되면서 방송교류는 답보상태, 앞으로 통일독일의 사례를 통해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

동서독 방송국간의 공식적 협력관계는 기본조약협정이후 14년 세월이 흐른뒤. 이후 언론이 독일통일의 커뮤니케이션 통로로 가교역할. 방송은 역사기록자면서 역사의 추진체도 된다. 방송을 통한 교류가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 북한 라디오방송 - 조선중앙방송, 평양라디오, 평양인민FM, 구국의소리방송

* 북한 TV방송 - 조선중앙TV방송, 개성TV방송, 만수대TV방송, 교육문화TV방송

* 북한 방송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언론이론을 북한정권의 정치적역사적 조건에 맞추어 적용한 것이다.

방송의 대중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다수 인민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고 통제하여 인민에 대한 선전선동과 동원에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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