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3일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4000만 달러로 시작된 한 미술품 경매는
그때까지 역대 사상 최고가 1억1992만2500달러(한화 약 1355억)를
기록하며 경매 시작 단 12분 만에 종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세계 미술품 경매 최고가 액은
지난 201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판매된 파블로 피카소 作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 1932>의 1억640만 달러 였었는데요
이날 경매 최고가를 경신한 작품이 탄생하게되는데요
경이적 작품은 노르웨이 출신
표현주의 작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1895년 作 <절규The Scream>
이날 최고가 판매된 <절규>는 뭉크의 4종 <절규> 중
유일한 개인 소장 작품 이였다고 합니다.
이후 뭉크의 또 다른 작품 <다리 위의 소녀들 1902>은 2016년 11월
14일 같은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5천450만 달러(약 637억 원)에
판매되는 저력을 보여 뭉크의 작품들은 미술 콜렉터들의 욕망을
채워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가치를 증명하게 됩니다.
현대인의 영혼_The Modern Soul을 그림으로 표현해 인간의 내면을
예술로 승화시켜 모더니즘을 열어낸 <절규_Scream>의 화가,
생활고에 고통 받던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살아 생전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인정 받은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했던 표현주의 화가로 유명하죠
에드바르드 뭉크_Edvard Munch(1863~1944)
벌거벗은 몸을 드러낸 채 화염의 그림자 한 복판에 서있는 뭉크.
뚜렷하지 않은 얼굴 속 섬뜩한 두 눈은 세상에 대한 반항심을 보이는 듯 하고
곧 자신을 집어 삼킬 것 같은 불안한 구도의 뒷 배경은 기독교적 개념의
지옥으로, 저주받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추방되는 저승세계를 표현 하고자
한 것으로 이는 뭉크 자신이 살아온 삶이기도 합니다.
1930년 뭉크는 자신의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의 모든 작품은 질병에 대한 사색에서 비롯되었다.
두려움과 고통이 없었다면 나의 삶에는 방향키가 없었을 것이다.”
“질병, 정신이상, 죽음은 나의 요람을 수호한 검은 천사들이었다.”
에드바르드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가난한 군의관인 아버지
크리스티안 뭉크_Christian Munch 와 그의 20살 어린 아내
라우라 비욀스타드_Laura Cathrine Bjølstad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신통치 않은 수입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녀야 했던
뭉크 가족은 크리스티아니아(현 오슬로의 옛 지명) 노동자 촌에
정착 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형제 중 둘째였던 뭉크는 불과 5살 때인 1868년 당시 유행하던
결핵으로 어머니 라우라를 잃게 되었고 1877년에는 뭉크에게 어머니를
대신하였던 사랑하는 1살 터울 누나 누나 소피에도 떠나보내게 됩니다.
어머지와 누나가 사망한 후 뭉크 형제를 돌봐준 사람은
이모 카렌 비욀스타드 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소녀(소피에)와 슬픔에 고개 숙인 여인(이모 카렌)은 뭉크 자신의
경험적 기억을 바탕으로 그려낸 그림으로 누이 죽음에 강박적 집착으로 뭉크는
6가지 버전의 ‘병든아이’를 그렸습니다
뭉크는 만성 천식 기관지염으로 어려서부터 고통을 받았고 자주 열이
심하게 나 헛소리를 하는 등 정신적 문제도 있어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죽은 어머니><병든아이><병실에서의 죽음>과 같은 후기 그림들은
어머니 라우라와 누나 소피의 죽음과 관련된 기억을 표현한 것입니다.
뭉크가 기억하는 죽음의 미소는
그의 어머니의 미소였을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린 뭉크를 끈질기게 따라다닌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질병에
관한 이야기는 성년이 되어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뭉크의 집안은 노르웨이에서 유서 깊은 가문으로 아버지는 종교적
관습에 따라 엄격하고 절제된 프로테스탄트적 삶을 살았던 사람인데요
“나의 아버지는 광기의 경계에 다다를 수 있는 선천적인 신경과민을 가졌다.
내가 물려받은 것 또한 이 지독한 신경과민이다”
뭉크가 화가의 길을 걸으면서 크리스티아니아의 허무주의적이고
자유 연애를 지향하는 아방가르드한 보헤미안들과 어울렸던 것도
이런 아버지의 영향이 컷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뭉크 미술의 특징은 질병과 죽음 그리고 불안으로부터 탄생 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의 심리와 감정을 상징적이고 시각적으로
표현해 직접적이고 호소력 짙게 관객들에게 전달 한다는 점이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2. 뭉크 사건_Munch Affair
뭉크가 엔지니어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 크리스티안의 권유에 따라
1880년 17살 때 크리스티아니아 Technical College에서 1년간
훈련 하던 뭉크는 “그림이 내 삶의 일”이라 결정하고
왕립 예술 디자인 학교에 입학 하게 됩니다.
1882년 6명의 동료와 스튜디오를 임대한 뭉크는
자연주의적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883년 가을 전시회를 통해
<아침>이 예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게되면서 데뷔 하게 됩니다.
인상주의를 연구하던 1880년대 후반 고향 크리스티아니아에서
두 번의 전시회를 열었던 뭉크는 1892년 베를린 예술협회
아델스틴 노만 Adelsteen Normann 의 초청으로 자신의 작품 55점을
가지고 첫 개인전을 베를린에서 개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뭉크의 작품들 <키스Kiss><그 다음날 The Day After>
<해질녘 지친 기분. 절망 Sick Mood at Sunset. Despair> 등이
당시 보수적 이였던 비평가들과 부르주아 콜렉터 들에게
‘미완성’ 이라는 혹평을 받으며 전시회는 일주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에는 인상주의적 화풍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로 뭉크의
그리다 만 것 같은 화풍이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감정적인 혼란을 담은 주제가 도덕적으로 의심스럽다’는
혹평을 받았던 것이었죠.
뭉크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기존의 예술적 관례를 거부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들을 1893년 까지 뒤셀도르프, 쾰른 등
독일 여섯 전시장에서 순회 전시 하며 자신을 비웃던 비평가들에게
도발적 모습을 보였고 이후 아예 독일에 정착해 자신을 냉대했던
베를린에서 다시 전시를 여는 고집을 보였습니다.
당시 작품 판매와 입장료 수입 등으로 비교적 흥행에 성공해
상당한 소득을 올리게 되었고
벌어들인 돈으로 베를린 가장 번화가인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의 공간을 대관해 자신의 파격적 최신작 <마돈나Madonna>
<뱀파이어Vampire><절규 The Scream><병실에서의 죽음 Death-
in the Sick Room>등을 전시하는 사업가 기질을 보입니다.
"내 책자에는 <키스>와<뱀파이어>의 첫 번째 초안이 담겨있다.
이들은 1885년과 188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뱀파이어는 사실 한 여자가 남자의 목에 키스하는 것일 뿐이다"
베를린 운터 덴 린덴에서 뭉크의 노력은 대중적 화제를 모으며
유명세를 얻게 되었고 이후 콜렉터, 미술관장들, 사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가면서 뭉크는 자신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베를린 전시는 보수적 비평가들에게까지 파장이 커지게 되면서
그들이 살았던 상징주의적 시대에 상응하는 상상, 개인성, 원시주의,
에로스적 섹슈얼리티 등 뭉크 작품의 외설적 작품 해설이 집중 조명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1895년 프랑스 학술지 르뷔 블랑슈의 편집자 타데 나단슨은
<절규>의 석판화본과 함께
“나는 죽을 것 같은 피로감에 멈추어 서서 난간에 기대었다.
검푸른 협만에 마치 화염 같은 핏빛 구름이 걸려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혼자서 불안에 떨면서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 라고 서평 하였습니다.
3. 표현주의_Expressionism
당시 유럽사회에서 유행하던 모더니즘 철학자 니체의 철학 사상에
심취되어 있던 안과의사이자 예술 후원자이기도 했던 컬렉터
막스 린데Max Linde는 뭉크의 작품에 대해
"프로메테우스적인 사슬로부터 스스로 해방시키고 자신의 의지로
말한다” 라고 말하며 "프랑스 인상주의자들의 <피상성><형식주의>를
대신해 완벽하게 형태화된 표현과 강한 개성의 경험을 형상화 한다”
라고 극찬하며 뭉크의 작품을 인상주의와 차별화 하였습니다.
헤르만 에스바인Hermann Esswein은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삶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며 작가의 성격과 상상력으로
순수하게 구현된 작품이다” 라고 말하기도했습니다.
뭉크의 작품을 “현대성을 추구하는 정신이라고 정의한 본질에
가깝게 다가가게 하는 마지막 경향의 작품” 이라고 평하며
뭉크를 <북쪽의 게르만인>으로 까지 부르며 존경하였습니다.
급기야 독일 문화사학자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Arthur Moller van-
den Bruck는 "뭉크는 지역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독일인 보다 더 독일
혈통에 가깝다”라는 주장 하기까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1900년대 독일의 비평가들과 역사학자들은 뭉크를
그의 조국 노르웨이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면서 까지
독일인으로 편승시키려 노력 하였습니다.
20세기가 된 1900년~1908년 사이 55회가 넘는 개인전과 단체전을
준비하며 3회에 걸쳐 국비 지원을 받아 끊임없이 여행을 다녔던
뭉크는 1905년~1908년 사이 알코올 중독에 이를 만큼 많은 술을
마시면서 ‘심각한 신경이상’에 빠져 정서불안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코펜하겐에 있는 그 병원에 들어가기 전,
내가 무분별하게 와인과 꼬냑을 목구멍에 들이붓고
가장 독한 시가를 피웠던 나날들을 기억할 수 있다.
며칠 후 나는 나를 거의 죽음 가까이 몰아간 발작으로 인해 쓰러졌다”
4. 여성혐오
뭉크는 세 명의 여성과 사랑을 하게 되지만 결혼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갑니다.
“나에게 가족은 그림 이외에는 없다”
<알파와 오메가Alpha and Omega>석판화 연작은 자기 자신을
문란한 여자들, 그를 비방하는 남자들, 불안 그리고 죽음에 둘러싸여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존재로 특정하는 자기 투사적 표현 이였습니다.
알파는 오메가를 사랑하였다
저녁이면 그들은 나란히 바닷가에 앉아
물 위로 흔들거리며 넘실대는 황금 달빛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면 알파와 오메가는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다
오메가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
절규하며 떠나기로 하는 알파...
알파가 떠남을 알게된 오메가... 알수 없는 표정이다...
뭉크가 유명해진 1902년 이후
스스로 자청해 모델이 되겠다는 여인들이 많았지게 됩니다.
Millie Thaulow
첫 사랑은
뭉크가 21세 되던 해 만난 <밀리 탈로>로
뭉크 보다 2살이 많은 연상녀 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유부녀이기도 했습니다.
뭉크의 후원자 ‘프리츠 탈로’의 형수이자 해군장교의 아내였던
밀리탈로는 사교계의 여왕으로 매우 자유분방한 기질의 여자 였습니다.
”자유분방한 그녀를 보며 나는 끊임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녀와의 5년이 넘는 관계는
그녀가 뭉크를 떠남으로 끝나버렸고
뭉크는 도망치듯 파리로 떠나게 됨
Dagny Juel
두 번째 사랑은
음악적 지식과 재능이 뛰어난
매력적인 미모의 작가 <다니엘 유엘> 이였습니다.
뭉크가 독일에서 유명해질 수 있었던 <마돈나Madonna>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유화가 아닌 판화인데 1895년에 흑백으로 제작하였다가
여러번 수정한 끝에 1902년에 완성했다
올챙이같은 정자들이 마돈나 주위를 헤엄치고 다닌다
액자 같은 붉은 테두리는 어머니의 자궁을 암시한다
태아 또는 신생아로 보이는 인물은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불행한 형상이다
다니엘 유엘은 결국 뭉크의 친구인 ‘프시비지예프스키’와
결혼 하게 되고, 그리고 그녀는 34세 생일을 앞두고
호텔에서 총을 맞아 사망하게 됩니다.
다니엘 구엘이 살해당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Tulla Larsen(1897-1902)
세 번째 사랑은
오슬로의 부유한 포도주 도매상의 딸이자 노처녀였던
<툴라 라르센>이였습니다.
라르센은 뭉크와 결혼을 원했지만
뭉크는 가정을 갖는 것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년을 넘게 만났지만 뭉크는 어느덧 그녀를 피해 다니게 되었고
얼마 후 이별을 알리게 됩니다.
뭉크는 툴라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
그녀와 뭉크 사이에 선을 그려넣어 그녀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었던 라르센은 뭉크 친구들의 도움으로
뭉크를 속여 그가 자신을 찾아오게 해 다시 만나게는 되었지만
뭉크는 라르센이 자기를 속인 것에 격노해 서로 타투다가
총기 오발 사고로 뭉크는 왼손 중지 두마디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팔렛을 잡은 뭉크의 손가락이 4개인데
가운데 손가락은 가죽장갑에 싸여 보이지 않는다
뭉크는 항상 장갑을 끼고 가급적이면
왼손을 사람들에게 안 보이려 노력했다
붉은 색의 해가 바다에 비친 것이다
가운데 붉은 드레스의 여자는 Millie이고
뭉크는 같이 춤을 추고 있지만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왼쪽 하얀 드레스는 Dagny 이고
오른쪽 검은 드레스가 Tulla이다
Eva Mudocci
스쳐간 사랑 에바
영국 출신의 바이얼리니스트로 1903년 파리에 연주공연을
왔다가 전시회에 참석하러 온 뭉크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3년후 서로 좋게 헤어지게 됩니다.
당시 연주가로 꽤 명성이 있었고
원래의 이름은 Evangeline Hope Muddock이었으나
유럽 연주여행을 많이 하게 되며 이탈리언 식으로
개명한 이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헤롯왕의 아내 살로메_Salome는 세례 요한에 원한을 품었다
그래서 그를 죽일 기회를 잡았고
그의 목을 잘라서 쟁반 위에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
세례 요한도 그렇게 거세 되었다.
뭉크는 성Sex관계를 여성이 죽음과 교미하는 과정으로 표현함
“죽음과 여성은 같은 냄새를 지닌다”
뭉크는 점차 여자를 증오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을 파괴시켜 죽음으로 몰아가는
혐오의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연인 앞에서 무릎을 꿇은 불행한 사람 위로 떨어지는 금비
핀에 찔려 파괴되고 마는 것을 용서하소서
사랑을 주고 받으려는 거룩한 불행을 쫓다가
미쳐 버린 사람 위로 떨어지는 금비
희망, 행복
피폐해진 몸으로 코펜하겐의 정신병원을 나와 8년만에 노르웨이로
돌아온 뭉크는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며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해안 도시 크라게뢰에 정착하게 됩니다.
크라게뢰에서 작업실을 운영하면서 고향 크리스티아니아 협만에
위치한 흐비스텐 지역 에켈리에 새로운 집 네드레 람메Nedre Ramme를
구입해 삶을 다할때 까지 이곳에서 작업하며 살았습니다.
뭉크가 노르웨이에 정착하면서 남긴 작품들은 이전의 우울하고
절망적인 고통의 삶의 표현과는 다르게 자연의 경외감,
노동의 즐거움 등을 다루면서 삶의 활력과 기쁨을 표현하려
노력 하였습니다.
조금씩, 하나씩 잇달아 드러나는
바다와 작은 섬들
그리고 절벽들
나는 그 절벽들 위로 솟아나는 태양을 보았다
나는 그 태양을 그렸다
1912년 독일 쾰른에서 열린 혁신적 분리파 전시회에서 뭉크는
근대 미술의 거장들 <폴 세잔><폴 고갱><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새로운 미술의 선구자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제목의 그림으로
뭉크는 모두 6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남겼음
뭉크는 고흐가 느낀 외로움에 동화되어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기기도 합니다.
“고흐보다 조금 더 오래 살고 있지만 고흐처럼 생각하고 열망한다.
내가 세상을 떠날때 까지 불꽃들이 소멸하지 않고
불타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를…”
1933년 70번째 생일에 <성 울라브의 대십자가 훈장>을 수여 받게 됩니다.
1937년 히틀러의 나치는 독일 미술관이 소장 중이던 82점의
뭉크 작품을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몰수 하였습니다.
1940년 2차세계대전 중 노르웨이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고
뭉크는 애국심에 자신의 모든 작품과 문서 기록, 스케치, 메모, 편지,
사진 등 장서와 가구, 도구, 개인 소지품을 포함해 28,000점을
오슬로 시에 기증하였습니다.
뭉크는 왕성한 작품활동과 전시 활동을 계속 하다
1944년 1월 23일 폐렴으로 에켈리의 집 네드레 람메에서
81세를 일기로 사망 합니다.
뭉크 작품의 모든 이미지는 뭉크가 직접 살아오면서 간직했던 것들에서
창작을 위한 목적으로 끄집어낸 특정한 기억들로부터 탄생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내가 보았던 것을 그린다”
에필로그
뭉크는 유년기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질병과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되었고 엄격하고 근엄한 종교적 윤리관을
가진 아버지에게서 우울한 문화 정서를 물려 받았지만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켜 스스로 성공하고자 노력했고
결국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에 애착이 많아서 전시회를 통해 작품이 팔리게
되면 똑같은 작품 여러 점을 다시 작업해 자신이 꼭 소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같은 제목의 여러 버전 작품이 남아있고 제작 년도의 편차도
심하게 다르다고 합니다.
뭉크는 말년에 카메라로 피사체를 찍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뭉크는 현재 조국 노르웨이에서 국가적 문화자산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화폐에도 인쇄되는 등 노르웨이 전국민에게 존경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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